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문단 편집) == 탄생 == [[파일:external/www.ec-patr.org/stachys.jpg]] 4세기 말경 동방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비잔티움 주교좌는 [[예수]]의 [[12사도]] 가운데 [[사도 안드레아스|사도 성 안드레아]]가 세웠으며, 그의 제자인 사도 스타키스(Απόστολος Στάχυς, 축일 10월 31일)가 초대 주교(主敎)가 되었다고 한다(38~54).[* 이 전승이 믿을 만한지는 여러 측면에서 의심받는데, 가톨릭 백과사전에서는 이 지역에서 기독교 활동의 흔적이 2세기 말-3세기 초 이전까지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5세기 시점에서 비잔티움 교회의 설립자가 사도 안드레아라고 주장한 티레의 주교 도로쎄오스 명의의 문서가 위조라고 서술했다. 네덜란드의 고대사학자 요나 렌더링은 livius.com에서 해당 전승이 5세기 이전에는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거의 확실히 틀렸다.'고 보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긴(330) 직후 도시 이름을 노바 로마(새 로마)로 바꾸었다. 이와 동시에 헤라클레아 관구에 속해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노바 로마) 지역이 독립 관구로 설정되었다. 이후,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관할구역에 넣었으며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로마의 [[교황]] 다음의 명예를 지닌 주교직으로 격상되어 종래 동방 지역 교회의 양대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두 교구를 뛰어넘어 일약 동방 교회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예루살렘 총대주교|예루살렘]]과 함께 총대주교좌로 지위가 올라가면서 공식 직함도 '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이자 세계 총대주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의 부상은 특히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당시 동방에서 가장 위상이 높았던 주교좌인 알렉산드리아와의 충돌을 야기했는데, 실제로 칼케돈 공의회 때까지 교회 정치의 뜨거운 감자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